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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와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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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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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080 2021/07/31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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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자 퇴계 이황은 시험 운이 없었다.

과거에 세 번이나 낙방했고 20대 후반이 돼서야 고시 낭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성적은 진사시, 문과 초시 등에서 2등을 하는 데 그쳤다.

라이벌이던 율곡 이이가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장원급제만 9번 한 데 비하면 초라한 이력이다.

이황의 인생은 이이에 비해 기구했다. 이황은 수양을 중시한 주리론의 태두였고 동인의 정신적 지주였다. 이이는 실천철학을 강조한 주기론을 앞세웠으며 주로 서인이 이이를 추종했다.

두 세력 간 대결에서 서인이 승리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책상물림으로 공부만 한 동인은 실천을 중시한 서인을 현실 정치에서 당할 수 없었다. 당연히 동인의 지도자인 이황도 벼슬 운이 없었다. 자의와 타의로 귀향과 복직을 거듭한 이황은 단양군수·풍기군수 등 외직을 돌았고 훗날 대제학과 예조판서를 지냈지만 이것도 병환으로 오래가지는 못했다. 뛰어난 행정가였던 이이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이황은 아내 복도 없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지만 27세에 죽었고, 재혼한 권씨 부인은 정신질환을 심하게 앓는 사람이어서 평생 이황을 힘들게 했다.

이런 기구함 때문이었을까. 이황은 삶을 이해하는 폭이 깊고 넓었다. 이황은 한마디로 너무도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늘 타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했다.

"사람에게 사사로움이 생기는 것은 사려(思慮)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비록 하찮은 말이라도 반드시 잘 생각하고 답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곧장 대답해서는 안 된다."

기록을 뒤져보면 이황의 인간미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는 차고 넘친다. 둘째 부인 권씨에 대한 배려는 대단했다. 정신질환을 앓았던 데다 갑자사화에 연루된 집안의 딸이었던 권씨 부인은 번번이 이황의 발목을 잡았다. 부인의 특이 행동을 무마하러 뛰어다녀야 했고, 벼슬길에도 지장을 받았다. 하지만 이황은 첫째 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에게 권씨를 친어머니로 예우하라고 가르쳤고 자신도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

며느리와의 일화도 있다. 둘째 아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가 안쓰러웠던 이황은 사돈댁에 재가를 허락하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풍토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다.

갓 태어난 증손자가 젖이 부족한 일이 있었다. 집안 사람들은 마침 아이를 낳은 하녀를 보내 젖을 먹이려고 했다. 그러자 이황은 "내 자식 살리겠다고 남의 자식을 굶겨 죽일 수는 없다"며 이를 만류했다.

홍문관 대제학 때 말단 관직에 있던 고봉 기대승이 논쟁을 걸어오자 격의 없이 상대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국립대 총장 격인 대제학이 자기보다 26세나 어린 9급 주무관이 걸어온 싸움에 권위를 내려놓고 진지하게 응한 셈이니 이황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학봉 김성일은 '퇴계어록'에서 "퇴계는 늘 스스로를 다스리고 사물에 한결같이 정성을 다하니 단 한 점도 비루하고 거짓된 마음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현인이란 이런 것이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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