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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알고보니 한우천국?···한 해 잡은 소만 40만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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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67 2024/02/12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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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람들, 소고기 맛에 흠뻑 빠지다



추운 겨울날 나무 밑에서 벌어지는 소고기 파티(일부 그림). 조선후기 초겨울이 되면 볼 수 있다는 ‘난로회(煖爐會)’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풍속화다. [국립중앙박물관]“우리 풍속에 화로에 숯불을 피워놓고 석쇠(燔鐵·번철)를 올려놓은 다음, 기름·간장·계란·파·마늘·후춧가루로 양념한 소고기를 구워먹는데 이를 난로회(煖爐會)라고 한다. 숯불구이는 추위를 막는 시절음식으로 이달(음력 10월)부터 볼 수 있으며 난로회는 곧 옛날의 난난회(煖暖會) 같은 것이다.”

홍석모(1781∼1857)가 <동국세시기>에서 소개한 음력 10월(이하 음력) 서울풍속 중 하나다. 책이 언급하는 음식은 조선시대 소고기 요리의 최고봉이라는 ‘설하멱적’(雪下覓炙·눈내릴 때 찾게 되는 구이)이다. 음력 10월이면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눈이 내릴 때 쯤, 화로 앞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구워먹던 고기가 바로 설하멱적인 것이다.

가난하고 궁핍했던 조선시대, 소고기는 ‘큰 솥에 물 한가득 붓고 끓여 멀건 국으로 겨우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을 것으로 인식되지만, 뜻밖에도 그시절 사람들은 현대인도 귀해서 잘 먹기 힘든 소고기를 숯불에 구워먹었다. 사실, 조선사람들은 소고기 마니아였고 조선은 한해 40만 마리의 소를 도축하는 ‘소고기 왕국’이었다.

“잔치집에 소고기 빠지면 잔치 아냐” 부잣집 소 2~3마리씩 잡아

성협 필 풍속도(19세기). 남자 5명이 숯불 위에 소고기를 구워먹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조선 사람들은 여러 육류 중 소고기를 제일 좋아했다. “우리나라의 풍속이 소고기를 가장 좋은 맛으로 생각해서 이를 먹지 못하면 살 수 없는 것 같이 여깁니다. 비록 금령이 있지만 오히려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1683년(숙종 9) 1월 28일, 송시열(1607~1689)이 숙종에게 소를 늘리는 대책을 제안하며 언급한 내용이다.

박제가(1750~1805)의 <북학의> 역시 “어떤 사람이 돼지 두 마리를 사서 짊어지고 가다가 서로 눌려서 돼지가 죽었다. 하는 수 없이 그 고기를 팔게 되었지만 하루가 다 지나도 돼지고기는 팔리지 않았다. 이는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소고기를 유난히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늘날 전라도에서는 잔치에 홍어가 빠지면 잔치가 아니라고 한다지만 조선시대 서울에서는 잔치상에 반드시 소고기가 올라와야 했다. 이덕무(1741~1793)의 <세시잡영歲時雜詠)>은 “(잔치때 잡는 소가) 부자들은 2~3마리(上富層數牛), 중간 부자들은 1마리(中富層一牛)”라고 했다.

임금의 수라에는 소고기가 빠지는 날이 없었지만 폭군 연산군(1476~1506·재위 1494~1506)의 소고기 사랑은 유별났다. <연산군일기> 1506년(연산 12) 3월 14일 기사에 따르면, 연산군은 소고기 먹기를 좋아해 불시에 고기를 올리라 했고 미처 준비하지 못했을 때는 길가는 소를 빼앗아 바쳐 원망하는 자가 길에 가득했다. 연산군은 송아지와 지라, 콩팥 등 특수부위를 즐겼다고 실록은 전한다. 소고기는 전투를 앞둔 군사들에게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술과 함께 지급되기도 했다. 진주목사 김시민(1554~1593)의 문집 <부사집>은 “왜적이 성을 포위하여 바야흐로 긴급하지만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공이 밤낮으로 성을 순시하며 소고기와 술을 군사들에게 먹였다”고 했다.

매년 얼마나 많은 소를 잡았나?

傳 김식(1579∼1662) 필 목우도. 농업이 근간인 조선에서 한해 농사를 위해서는 소를 잡지 않아야 하지만, 너무 금지만 해도 소의 숫자가 급증해 부담이 컸다. 나라에서는 강력한 법을 마련했지만 제대로 시행하지는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필 행려풍속도(일부). [국립중앙박물관]<북학의>는 “우리나라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궤(犒饋·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에 쓰기위해 도살하고 성균관과 한양 오부 안의 24개 푸줏간, 그리고 300여 고을의 관아에서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있다. ··· 서울과 지방에서 벌어지는 혼사, 연회, 장례, 활쏘기할 때에 잡는 것과 법을 어기고 사사로이 도살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그 수를 대충 헤아려보면 위의 500마리라는 통계가 나온다”고 했다.

<승정원일기>의 통계는 이를 훨씬 능가한다. <승정원일기> 1775년(영조 51) 3월 24일 기사에는 무분별한 도축의 폐단을 고발하는 인천의 유생 이한운의 상소가 올라와 있다. 여기에 도축규모가 상세히 언급돼 있다. 상소는 “서울에는 24개의 현방이, 지방에는 360개의 고을, 26개의 큰 병영과 여러 작은 병영, 여러 진보(鎭堡·진영과 보루), 여러 우관(郵官·역참의 외관직)이 도축하는 것이 이미 500여 마리를 넘는다. 서울과 지방의 사도(私屠·불법 도축)에 의한 것이 또 500여 마리를 넘으니 이를 합치면 하루에 1000여 마리가 되고 한달이면 3만 마리가 넘는다”고 했다. 그는 이어 “또 4명일(설·단오·추석·동지)에 서울과 지방에서 도축하는 것이 2만~3만 마리이니 1년이면 38만~39만 마리가 된다. 해마다 이 수를 도축하니 죽는 소의 숫자는 우역 때보다 더 하다”고 했다.

소 한 마리에 쌀 4석 가격···저렴했던 소고기

조선사람들이 소고기에 매료된 것은 소값이 너무 저렴해서였다. 1659년(효종 10), 조정은 번식된 소가 너무 많아 고민이었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1년 8월 17일 기사에서 대사간 이정영은 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뢴다. “소가 많이 번식되고 나서는 도리어 민간의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 죽음에서 구제되기에도 겨를이 없는 백성들이 소를 사육하여 살찌게 한다는 것은 사정이 더욱 어렵습니다.”

우역이 발생해 소가 대량폐사되면 도축금령이 강화되고 몇년 뒤에는 소의 수가 다시 증가하는 사이클이 반복됐다. 우역이 발생하지 않은 평소의 소값은 대략 20냥 수준이었다. <승정원일기> 1775(영조 51) 3월 24일 기사는 “예전에 소값은 10냥(兩)을 넘지 않았고, 지금은 30량 정도 한다(昔者牛價, 多不過十餘兩, 今者牛價三十餘兩)”고 했다.

이를 쌀값과 비교하면, 개략적으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할 수 있다. <정조실록> 1794년(정조 18) 12월 30일 기사에 따르면, 쌀 한 석(144㎏)당 가격은 4~6냥, 즉 평균 5냥이다. 소 한 마리 가격이 쌀 4석 밖에 안되는 계산이다. 요즘 쌀 한석 가격이 36만원 정도라고 가정할 때 소 한 마리는 144만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지금과 조선시대 쌀값의 절대 비교는 어렵지만 소값이 저렴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조선 사람들이 소고기를 자주, 그리고 많이 먹을 수 있었던 이유다.

도살은 불법이었지만 느슨하게 적용···제사기관인 성균관에 유일하게 도축 허용

소도축은 원천적으로 불법이었다. 구체적으로 육조의 법례를 수록한 백헌총요(百憲總要)을 보면, 도살한 사람은 영원히 관노로 삼아 외딴섬에 속하게 하고 변경에 온 가족을 이주시켰다. 도살을 지시한 사람도 장(杖) 100대 형벌과 전가지율(全家之律·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강제 이주)에 처했다. 그러나 이러한 금지법은 국초부터 지켜지지 않았다. 임금부터 그랬다. <세종실록> 1434년(세종 16) 8월 2일 기사에서 사헌부는 좌승지 권맹손, 좌부승지 정갑손, 우부승지 윤형, 동부승지 황치신이 함께 모여 소고기를 먹었다고 탄핵하자 세종은 “소고기는 사람마다 먹지 않느냐. 예전에 대사헌 허지가 ‘신이 항상 형장 100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실로 솔직한 말이다”라고 옹호했다.

성균관의 정전인 대성전. 조선후기 도성 내에서 소를 유일하게 잡을 수 있는 곳은 성균관이었다. 성균관 소속의 노비인 반인(泮人)은 현방(懸房)을 운영하면서 성균관에 고기를 공급하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남은 고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문화재청]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소를 잡을 수 있게 허가된 곳은 성균관이다. 성균관은 당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이자 각종 제사를 담당하는 관청으로서 나라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다. 소도살은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들, 즉 반인(泮人)들이 도맡았다. 성균관이 반궁(泮宮·중국 주나라의 학궁이 반수가에 있어서 생긴 명칭)으로 불려 성균관 노비도 반인이라고 했다. 이들 반인은 성균관에 고기를 공급하는 동시에, 현방(懸房)을 운영하며 도성 내 일반 백성들에게도 소고기를 팔아 그 이익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현방은 나라에서 공인된 소고기 판매시장였던 것이다. 19세기 편찬된 <동국여지비고>는 “현방은 소고기를 파는 곳이다. 반인이 판매하는 일을 맡았으며 고기를 걸어놓고 팔아 현방이라 부른다”고 했다.

도성내 소고기 판매점은 얼마나, 그리고 어디에 있었나?

현방은 조선후기 서울에서 23~24개 정도가 운영됐다. 정약용(1762~1836)의 <목민심서>는 “반촌(泮村·종로 명륜동)과 서울 5부 안에 있는 푸줏간이 24개”라고 했다. <동국여지비고>는 △중부 6곳 : 성균관, 하량교(중구 입정동), 이전(履廛·신발시장), 승내동(承內洞·종로 인사동), 향교동(종로 교동), 수표교 △동부 3곳 : 광례교(종로 혜화동), 이교(二橋·종로 연지동), 왕십리 △남부 4곳 : 광통교, 저동, 호현동(好賢洞·중구 회현동), 의금부(종로 공평동) △서부 7곳 : 태평관(중구 서소문동), 서소문 밖, 정릉동, 허병문(許屛門), 야주(冶鑄)고개, 육조 앞, 마포 △북부 3곳 : 의정부, 수진방, 안국방 등 23곳이라고 했다.

현방은 소고기를 독점 판매하는 조건으로 삼법사(三法司·형조, 한성부, 사헌부)에 수수료, 즉 속전(贖錢·죄를 면하기 위해 바치는 돈)을 바쳤다. 삼법사는 현방 수탈에 혈안이었다.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문헌을 종합하면, 한해 징수된 속전은 1704년(숙종 30) 7700냥이었다가 1733년 1만3800냥, 1793년(정조 17) 2만1800냥으로 늘었고 19세기에는 4만7000냥까지 치솟았다.

소가죽을 벗기는 백정들(일제강점기). 조선후기 관허 도축·판매업자인 현방이 서울에 24곳 가량 운영됐고 도성 밖에도 무허가 가게가 지속적으로 들어섰다. [국립중앙박물관]

백정가족과 가죽 작업장(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18세기 후반 도성 밖에 무허가 소고기 시장이 개설되면서 이들 관허 우전(牛廛)이 크게 반발했다. <승정원일기> 1781년(정조 5) 4월 10일 기사에 따르면, 송파, 사평장(沙坪場·광주) 아래의 간민(奸民), 동도의 누원(樓院·양주), 서로(西路) 점막(店幕) 등이 도성밖 소고기 시장들이다. 이들은 지방에서 도성으로 올라오는 소를 모두 수집해 매매했다. <비변사등록> 순조 23년 12월 12일 기록은 “서울 밖에 사포(무허가 가게)의 폐단이 전에 비해 날로 심해져 심지어 점막(주막)과 장시에서도 낭자하게 도살해서 파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고 했다.

“미식천국” 지금보다 더 다양했던 소고기 요리

오늘날 소고기는 숯불에 굽거나 국을 끓여먹는게 보편적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요리법은 훨씬 다양했다. 오늘날 숯불구이와 흡사한 설하멱적은 조선후기 미식가들의 초겨울 별미였다. 수육도 큰 인기를 끌었다. 조선중기 문신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에 의하면, 중종의 스승 김계우(미상~1539)는 부인과 함께 잘 삶은 소고기를 큰 쟁반에 펼쳐놓고 하루에 세번 배부르게 먹었다. 조선시대 도살된 소는 주로 질긴 늙은 소나 어린 황송아지였다. 장계향(1598~1680)의 <음식디미방>은 “살구씨 빻은 것과 떡갈잎을 한줌 넣고 삶으면 쉽게 무르고 연해진다”고 했다.

김유(1491~1555)의 <수운잡방>은 육면과 분탕을 소개한다. 육면은 고기를 가늘게 썰어 밀가루·메밀가루를 입힌 뒤 삶아 국수처럼 먹는 요리이고 분탕은 밀가루를 풀어 끓인 맑은 소고기 장국이다. 이와 함께 조선 요리서에는 서여탕(소고기·마·계란을 육수에 넣고 끓인 탕), 삼하탕(소고기 완자·물만두를 섞은 탕), 황탕(소갈비를 삶은 탕에 생강·잣·개암·노란 밥·갈빗살·고기완자를 넣고 끓인 탕), 양식해(소양을 익혀 밥·누룩·소금과 섞어 발효시킨 음식), 양숙(소양을 푹 삶아 갖은 양념으로 맛을 낸 음식), 토장(넙적국수), 소마(튀김만두), 타락(요구르트) 등 수많은 조리법이 등장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현재 소고기 요리를 접한다면, “무슨 맛이 이 모양이냐”, “또 쓸데 없이 왜 이렇게 비싸냐” 등의 불평을 늘어놓을게 뻔하다.

<참고문헌>

1. 김동진.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위즈덤하우스. 2018

2. 성균관과 반촌. 서울역사박물관. 2019

3. 강명관. 노비와 쇠고기. 푸른역사. 2023

4.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동국세시기(홍석모), 북학의(박제가), 세시잡영(이덕무), 목민심서(정약용), 어우야담(유몽인), 동국여지비고, 수운잡방(김유), 부사집(김시민), 장계향(음식디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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