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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6명·이건희 배웅한 염장이, 딸에게 부탁한 그의 마지막 순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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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96 2024/05/05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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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대통령 염장이’ 유재철 대한민국장례문화원 대표
1000만 관객 돌파 〈파묘〉 ‘유해진’의 실존 인물… 전통 장례 명장 1호
1994년부터 30년간 이주노동자부터 전직 대통령까지 4000명 염습
“법정스님 장례 가장 기억에 남아… 삼성 이건희 회장 수원 선산 장례 주관”

유재철(兪載喆 ·65) 대한민국장례문화원 대표는 1000만 관객을 훌쩍 넘은 영화 〈파묘〉 속 장례지도사 ‘고영근’(배우 유해진)의 실존 인물이다. 시체를 ‘염습(殮襲·고인을 마지막으로 목욕시킨 후 깨끗한 옷에 입혀 관에 모시는 일)’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염장이’ 혹은 ‘장례지도사’라 부른다. 전통 장례 명장 1호로, 올해로 일을 시작한 지 30년을 맞은 유 대표는 4000위가 넘는 영가(靈駕)들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냈다. 고(故) 최규하, 노무현,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등 전직 대통령들을 마지막으로 배웅한 ‘대통령 염장이’다.

유골 항아리 운구용 ‘반야용선’을 배경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대한민국 장례명장 유재철씨. 사진=오동룡
유골 항아리 운구용 ‘반야용선’을 배경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대한민국 장례명장 유재철씨. 사진=오동룡

인터뷰 전날, 유재철 대표가 “속리산 법주사 스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새벽부터 다비(茶毘·불에 태운다는 뜻) 준비 때문에 인터뷰를 장례 마친 다음 해야 할 것 같다”며 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산 사람과의 약속보다 죽은 사람과의 약속을 우선시해야 하는 ‘직업적 숙명’을 가진 유 대표의 전화였다.

“축문을 아주 찰지게 잘 읽더라”

지난 3월말, 서울 은평구 연신내에 있는 대한민국장례문화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무 평 남짓한 사무실엔 각종 장례 관련 용품들로 가득했다. 특히 유 대표가 특허를 냈다는 유골 항아리 운구용 ‘반야용선(般若龍船·극락으로 가는 배란 뜻)’이 중앙에서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화 〈파묘〉 이야기부터 꺼냈다. ‘파묘(破墓)’는 고인의 유해가 있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파헤치는 것을 말한다.

기자가 “배우 유해진씨가 원장님 역할인데, 연기가 어땠느냐”고 하자, “유해진씨가 염장이 역할을 하는데 무덤에서 귀금속 훔치는 부분도 있고 해서 실제와의 ‘싱크로율’은 49% 정도”라며 웃었다. 유 대표는 특유의 유장한 톤으로 “유~세차(維歲次)” 소리를 내며, “유해진씨가 축문(祝文)을 아주 찰지게 잘 읽더라”며 “역시 배우는 배우라고 느꼈다”고 했다.

— 파묘는 왜 하나.

“파묘는 여러 군데 흩어져 있는 산소를 모으거나, 관리가 힘들어 봉안당이나 봉안묘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다. 납골당이란 말은 일본식 단어여서 지금은 쓰지 않고 봉안당이라고 한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조상 탓으로 여겨 파묘를 했는데, 요즘은 산소를 한 군데로 모으려고 파묘를 한다.”

— 본격적으로 ‘염’을 하게 된 시기는 언제인가.

“1994년 7월 무렵이다. 당시만 해도 장의사라는 직업은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직업 중의 하나였다. 지금은 스님이 됐지만, 장의사 일을 하는 친구가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그 길을 걷게 됐다. 그 친구는 ‘고인과 유족을 돈으로 보지 말 것’ ‘따로 홍보하지 말고 일 잘해서 입소문 나게 할 것’ ‘장례 공부를 계속할 것’이라는 충고의 말을 해주었다.”

유재철 대표는 불교와 인연을 맺으며 ‘염장이’ 일을 시작했다. 1996년 6월 25일 일붕(一鵬)스님(대한불교 일붕선교종 초대종정 역임)이 입적한 날, 처음으로 큰 장례를 맡았다. 이후 유재철 대표는 2003년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장례 때 사체 영구보존 기술인 엠바밍( Embalming) 과정에도 참여했고, 2015년 이맹희  CJ 명예회장 그룹장 주관에 이어, 2020년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의 장례를 주관했다.

그는 장례 문화 정립을 위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국대에서 ‘한국 단체장’으로 석사 학위를, 동방문화대학원대학에서 ‘한국 국가장’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 대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11호 사직대제 이수자다. 2017년에는 ‘대한민국 전통 장례 명장 1호’에 선정됐다. 유 대표는 2006년 최규하 전 대통령 국민장을 시작으로 2009년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 2022년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례를 직접 지낸 뒤 ‘대통령 염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 최규하 대통령 염습은 어떤 계기로 하게 됐나.

“석사 논문 주제를 ‘한국의 단체장’으로 잡고 자료를 모으고 있을 때, 당시 동국대대학원 몇몇 교수와 장례비즈니스아카데미 1년 과정을 개설해 강의하고 있었다. 수업에 대통령 장례식 자료가 필요해 행정안전부 의정팀에 연락한 적이 있었다. 2006년 10월 새벽  TV에서 최규하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 ‘뉴스 속보’로 쏟아졌다. 바로 고인을 모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이후 국가무형문화재 사직대제 제의집전 기능 보유자 이건웅(李建雄) 선생님, 풍수가로 2005년 영친왕 아들 이구(李玖) 선생의 왕실 장례를 주관한 이홍경(李洪卿) 선생님 두 분을 모시고 다시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유족들은 ‘마침 잘 됐다’며 최 전 대통령의 유지(遺旨)가 담긴 파일을 보여주었다.”

— 당시만 해도 대통령 장례에 대한 분석이나 기록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여서 어려움이 많았겠다.

“장례의 격을 높이는 것에 유족은 흔쾌히 동의했고, 염을 내게 맡겼다. 박정희 대통령, 윤보선 대통령 자료를 참고해 명정(銘旌·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 하나 쓰는 것까지 심혈을 기울였다. 국민장 기간 동안 2004년 돌아가신 홍기(洪基) 여사 묘소를 선산에서 이장한 후, 고인과 함께 대전현충원에 나란히 합장했다.”

— 최규하 대통령의 모습은 어땠나.

“서울대 장례식장 입관실에서 처음 뵌 최 전 대통령은 편안하게 누워계신 할아버지 모습이었다. 이홍경 선생님이 대전현충원의 대통령 묘역을 살폈다. 대통령 묘가 대전현충원에 들어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홍경 선생이 묘역 가장 좌측의 최 전 대통령 자리 정중앙에서 뒤로 조금 물러난 곳을 파니, 다섯 빛깔의 오색토(五色土)가 나왔다. 흔치 않은 명당이었다. 장례를 주도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영화 ‘파묘’의 스틸컷. 고영근(유해진 분)이 운영하는 장의사 사무실 뒤로 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식 운구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쇼박스
영화 ‘파묘’의 스틸컷. 고영근(유해진 분)이 운영하는 장의사 사무실 뒤로 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식 운구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쇼박스

노무현 대통령 시신 ‘엠바밍’

— 노무현 대통령은 병사(病死)가 아니어서 온 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노 대통령이 돌아가신 2009년 5월 23일은 토요일이었다. 전날 여운계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 염을 하고 있는데, 이튿날 오전에 입관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휴대전화 진동이 쉴 새 없이 울렸다. 노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문자가 수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급히 서울역으로 달려가 봉하마을로 내려가고 있는데, 다시 부산대학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 병원으로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나.

“혹시 투신(投身)에 따른 충격으로 얼굴이 많이 상하시지 않았을까 염려했다. 부산대병원 장례식장 안치실에서 고인을 처음 뵀는데, 다행히도 얼굴은 깨끗하시더라. 몸에 묻은 피를 닦아드리고, 바지와 저고리를 입혀드리면서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은 어땠나.

“엠바밍을 하며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굳게 다문 입술에서 깊은 고뇌의 심정이 느껴졌다. 3일째 새벽 고인의 목욕을 마친 후, 수의를 입혀드리고 유족과 비서진에게 대면을 시켜드렸다. 그런데 권양숙 여사는 들어오다 북받치는 슬픔을 못 이겨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수의에 눈물 닿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유족의 눈물이 마를 때까지 흐느끼며 두는 것이 마지막 인사이고 정리라고 생각했다.”

— 김대중 대통령은 기록을 많이 만든 장례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2009년 8월 18일 동국대 전직 대통령 장례 절차에 대한 세미나에서 2부 사회를 보기로 했는데, 김대중 대통령 서거 소식이 전해졌다. 세미나장을 박차고 나와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향했다. 행안부 직원들은 나를 보자마자 장례 자문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미 김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했던 박지원(朴智元) 의원이 사전에 연세대 신촌장례식장 측에 염습을 맡긴 터였다. 나는 국회의사당 빈소와 시신 안치, 분향소 운영 관리, 영결식 후 운구 행렬 등의 실무적 장례 절차를 맡게 됐다.”

―최규하‧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장, 김영삼‧노태우 대통령은 국가장으로 치렀다. 똑같은 전직 대통령인데, 왜 김대중 대통령만 국장인가.

“유족은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길 원했으나, 정부는 뜸을 들였다. 당시엔 ‘국장과 국민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 국장으로 치를지 국민장으로 치를지를 결정했다. 국장이 국민장보다 격이 높다. 국장은 기간이 9일이고, 국민장은 7일 이내다. 국장은 영결식 당일 관공서 문을 닫지만, 국민장 때는 정상운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게다가 국장은 국가가 비용 전액을 부담하지만, 국민장은 국가가 일부 비용만 보조하고, 나머지는 유족이 부담한다. 결국 사회적 논란이 있었지만, 정부는 국민장으로 결정했다. "

YS, 푸근한 이웃집 아저씨 모습

— 김영삼 대통령 장례 때는 처음으로 국가장으로 치러졌다.

“2015년 11월 22일 새벽 아내가 잠든 나를 깨워 김영삼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했다. 2011년 ‘국가장법’이 제정된 이후 처음으로 치러지는 ‘국가장’이었다. 예지원 순남숙 원장님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역사기록물을 관리하는 김시덕 박사와 함께 첫 국가장을 준비했다. 고인을 안치실에 모시고 나와 얼굴을 확인하니 푸근한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원래 웃는 상(相)이시라 그런지 그렇게 평온해 보일 수가 없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 때는 어떤 점이 개선됐나.

“‘건전가정의례준칙’에 따라 상주의 완장을 없애기로 했다. 1934년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의례준칙’에서 양복의 경우 왼팔에 검은 천을 두르도록 새로운 상장(喪章)으로 공식화한 것이다. 우리 전통 상복에는 심장과 가장 가까운 왼쪽 가슴에 ‘쇠(衰)’라고 불리는 베 조각을 단다. 거친 베에는 효를 다하지 못한 심정을 담았고, 왼쪽 가슴에 달아 상을 당한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 대통령 유족들께 상장의 역사에 대해 설명드리니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운구병들이 마스크를 쓰는 것도 군사문화의 하나였기 때문에 마스크를 벗겼다.”

유재철 대표가 김영삼 대통령 안장에 앞서 대통령 직함이 적혀있는 명정(銘旌)을 걷는 모습. /사진=대한민국장례문화원
유재철 대표가 김영삼 대통령 안장에 앞서 대통령 직함이 적혀있는 명정(銘旌)을 걷는 모습. /사진=대한민국장례문화원

노소영, “장례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 노태우 대통령 측과는 이전부터 연락이 됐었나.

“사실 2009년 말부터 노태우 대통령 비서관이 대통령이 위중할 때면 수시로 연락을 해왔다. 2021년 10월 26일 정오 무렵, 노 전 대통령이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서울대병원에 갔을 때 이미 노 전 대통령은 운명한 상태였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날이고, 최규하 대통령 영결식이 열린 날이기도 했다. 1980년 서울의 봄 시절, 중앙대 문창과 학생들과 대자보 붙이고 시위하다 붙잡혀 성남경찰서에 석 달 동안 잡혀 들어간 적이 있다. 〈서울의 봄〉 영화도 보았는데, 노태우·전두환 두 분의 염습을 내가 하게 되니 이것이 불교의 ‘인연법’ 아닌가 생각했다.”

— 노태우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은 어땠나.

“노소영씨와 노재헌씨에게 아버님의 손을 닦아드리고, 다시 아버지의 ‘습신’을 신겨드리라고 요청했다. 두 자녀는 더 이상 아버지를 보지도 만지지도 못함에 손길 하나, 눈길 하나마다 고인을 향한 애틋함과 그리움을 담아 신을 신겨드렸다. 장례식엔 이렇듯 슬픔의 감정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했던 고인에게 유족들이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염습’이란 장례 문화로 탄생한 것이다.”

— 노태우 대통령은 유족들이 국가장을 신청했다.

“돌아가시고 이튿날 오전, 노 대통령의 장례가 국가장으로 결정돼 이름만 적어 넣었던 고인의 명패가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노태우’로 바뀌었다. 고인을 모신 관 내부를 종이꽃과 생화를 섞어 남북통일과 평화를 염원했던 유지를 담아 한반도 모양의 꽃꽂이를 했다. 의식을 모두 마치고 천판을 덮자, 노소영 나비 관장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장례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어요. 정말 감동적이었다’며 기념사진을 찍자고 했다. 관을 앞에 두고 유족과 사진을 찍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으나, 슬픔의 감정에만 매몰되지 않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 육사 11기 동기로 정치적 후계자였던 노태우 대통령이 먼저 서거하고, 28일 후에 전두환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것도 묘하다.

“전두환 대통령 유족은 국민 여론을 고려한 탓인지 국가장 신청을 하지 않아 5일간의 가족장으로 치러드렸다. 이후 약 10일 뒤에 노 전 대통령의 안장식까지 진행해야 했으니, 한 달 보름간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실제로 일정을 모두 소화하니 몸살이 났다. 문득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노태우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의 죽음의 시기가 뒤바뀌었다면, 과연 노태우 대통령의 유족들이 국가장을 원만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을까.’ 이런 점에서 노 대통령은 운이 좋은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젊은 놈들이 이걸 배우냐’

유 대표는 기자를 만나기 전 5일장으로 진행된 충북 보은 법주사 원일스님 다비 안장식을 주관했다고 한다. 그는 1994년 조계사 앞에 ‘연화회’를 차린 이후 일붕스님, 석주스님, 숭산스님, 법정스님, 지관스님, 법전스님, 녹원스님, 보성스님, 고산스님, 월주스님, 고우스님 등 전국 470여 사찰 큰스님들의 장례와 다비를 진행했다. 2000년 동국대 100주년기념사업본부장이던 정토사 보광스님은 대학원에 장례문화학과를 개설했고, 유재철은 이곳에서 우리나라 전통 장례와 스님 장례, 단체장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유 대표는 2002년부터 해인사, 통도사 등 전국의 사찰을 돌며 불교 장례인 다비에 대한 연구도 지속적으로 했다. 그가 새로운 방식의 다비를 고민하게 된 것은 2013년 동방문화대학원대학에서 ‘한국의 국가장’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조계종에서 그에게 다비에 관한 조사 보고서 용역을 의뢰하면서부터였다. 유 대표는 2013년 조계종 ‘다비조사보고서’ 자문위원으로 해인사, 선암사, 범어사, 백양사, 수덕사, 봉선사 등 전국 6개 유명 사찰을 직접 방문해 다비 담당 스님들을 만났다. 조계종은 2012년 연등회(燃燈會)가 국가무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된 후, 문화재 차기 등록 후보로 ‘다비’를 지정해놓고 있다.

— 사찰마다 다비 방식이 통일돼 있지 않았나.

“조사보고서 의뢰를 받고 전국 6대 사찰을 돌며 큰스님들을 찾아뵀더니, 전부 70~80대 노스님들이 다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왜 노스님들이 이걸 하고 계시냐고 하니, ‘요즘 젊은 놈들이 이걸 배우겠냐’고 하셨다. ‘스님, 제가 배울게요’라고 했더니 정성껏 가르쳐주시더라. 나무 쌓는 법, 불 붙이는 순서, 불길 관리하는 법 등 다비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

— 힌두교 성지인 인도 바라나시( Varanasi)에 가니 시신을 노출해 하루 종일 태우더라. 우리의 다비와 다른가?

“우리 다비는 시신을 노출하지 않는다. 참나무로 하는 다비는 시간이 오래 걸려 밤을 새우는 단점이 있다. 법정스님의 다비식의 경우, 오후에 시작해 이튿날 오전까지 거의 20시간 동안 이어졌을 정도다. 밤새 추운 데서 벌벌 떨면서 기도하는 분들을 보면 숙연해지고, 한편으로 다비 시간을 단축하면 더 많은 분이 함께하실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범종 제작의 대가인 국가무형문화재(제112호 주철장)인 성종사 원광식(元光植) 대표는 ‘미련한 것들, 바람을 세게 불어넣어야 온도가 최고로 올라가지’라며 송풍(送風)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석 달 동안 궁리를 거듭한 결과, 전통다비를 현대식으로 계승한 ‘연화다비(蓮花茶毘)’의 초기 형태를 만들 수 있었다.”

유 대표는 “연화다비는 원하는 장소에서 날씨 걱정 없이 경내 200평의 공간에서 최단 3시간에 습골(拾骨)까지 가능하다”며 “2013년 10월부터 2024년 3월까지 11년 동안 전국 스님 다비 171회 가운데 연화다비로 135회(79%)를 봉행했다”고 했다.

자는 듯 임종한 법정스님

— 가장 기억에 남는 스님 장례는.

“2010년 3월 11일 입적하신 법정스님 장례다. 법정스님은 순천 송광사 여름수련법회에서 내게 ‘바르고 깨끗하게 행한다’는 뜻의 정행(正行)이란 법명도 주셨다. 법정스님이 임종하시기 직전 오대산 토굴에서 길상사로 모셨다. 숨을 거두신 법정스님을 수습하기 위해 행지실(行持室)로 들어섰을 때, 주무시는 것 같아 ‘스님’ 하며 흔들어 깨울 뻔했다. 그렇게 편안한 표정으로 숨을 거두는 사람은 흔치 않다. 법정스님의 유지대로 수의 대신 평소 즐겨 입으시던 승복(僧服)을 입혀드렸다.”

— 관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그래도 다비장까지 운구하려면 상여가 필요했다. 법정스님이 오대산 암자에서 명상하시거나 낮잠 주무실 때 쓰던 대나무 평상을 누군가 길상사로 옮겨놓았는데, 이걸 쓰기로 했다. 화환은 유지대로 돌려보내고 위패에 ‘비구 법정’ 네 글자만 썼다. 모든 것이 법정다웠다. 다비는 송광사에서 진행했다. 스님을 모신 나무 장작 더미 안으로 불을 붙였다. 3월 꽃샘추위가 한창인데도 수많은 참관객이 다비장을 지키며 밤샘 기도를 올렸다. 불 들어간 지 20시간 후에 습골했다.”

— 삼성 측이 이건희 회장의 장례를 맡겼다.

“2020년 10월 25일 오대산 월정사 육수암에서 수행정진하셨던 뢰묵스님의 다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삼성 비서실 직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외부에 절대 알리지 말고 꼭 필요한 인원만 데리고 오라는 거다. 나는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그날 새벽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다는 뉴스가 나왔기 때문이다. 삼성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수원 선산(先山)에 들어서니 결 고운 넓은 잔디밭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삼성 측은 이곳에 이건희 회장 묘소 조성 작업을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선산 관리자는 고인에 대한 예를 최대한 갖추고 싶다며, 광중(壙中·무덤의 구덩이)을 팔 때 기계를 사용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 상주인 이재용 부회장의 요구사항은 없었나.

“통상 장지에선 관을 하관(下棺)하고, 유족들이 광중 네 귀에 길(吉)한 방향에서 떠온 흙을 조금씩 뿌리는 취토(取土)를 하고, 회다지를 인부들이 하고 평토(平土)를 하는 순서다. 이건희 회장 때, 아드님 이재용(李在鎔) 삼성전자 회장이 ‘아버지와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낸 분들도 취토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해서 이학수 전 삼성그룹 비서실장 등 임원 70여 명이 취토에 참가했다. 경영자 마인드를 지닌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삼성 측에서 어떻게 알고 연락을 했나.

“삼성 비서실 임원 한 분이 내가 노무현 대통령 장례를 주관하는 것을 주목했고, 회장님이 쓰러지신 후 실무적 검토를 했다고 하더라. 매장 후 이틀이 지난 10월 30일 우제(虞祭) 때 유족과 함께 선산을 찾았다. 봉분에 빗물이 고이지 않도록 흙을 경사지게 쌓아 사성(莎城·무덤 뒤에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쌓은 흙더미)을 만들어두었는데, 문제는 없는지 봉분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때 이재용 부회장과 홍라희(洪羅喜) 여사가 다가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묫바람’

천하의 권력자도 피해 갈 수 없는 인생의 손님 ‘죽음’. 유재철 대표는 그 죽음을 일상에서 마주하고 산다. 염습 과정은 고인을 깨끗하게 닦아드리고 단정하게 수의를 입혀드린 다음, 손발톱을 깎아드리고 악수(幄手·시신의 손을 싸는 보자기)와 버선을 신겨드리면서 마무리된다. 잘라낸 손발톱을 삼베 주머니에 고이 넣어 악수와 버선 속에 넣어드린다.

— 실제로 귀신을 본 적이 있나.

“1994년 여름 광주에서 처음 염을 배웠을 때인데, 고인의 허름한 집에서 사고사로 죽은 시신을 염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아저씨의 인생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린애들이 뭐 그냥 막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 고인의 영정을 바라보며 30분 정도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자려고 누웠는데 그 아저씨가 위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업계에서 말하는 ‘묫바람’이라는 것인데,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 그럼 어떻게 하나.

“개운사 암도스님(조계종 포교원장 역임)께 여쭤보니, 내 등을 탁 치시면서 ‘야 인마, 일만 하면 되지 영가 걱정은 왜 했어? 마음의 집착이 있어 놓지를 못하니까 영가가 주변에 있는 거야. 그분이 좋은 일 했으면 극락 가고, 잘못 살았으면 지옥 가는 거다’라고 했다. 그 후로는 어떤 시신을 맞닥뜨려도 염습에만 열중한다. 고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보다 정성껏 염해드리는 것이 나에겐 중요하다.”

— 망인들의 손과 발을 보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충 짐작이 가나.

“발뒤꿈치도 그렇다. 손발이 거칠고 고생하신 분들은 애틋함이 느껴져 더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어린이병원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어린아이들의 가냘픈 발을 보면 가슴이 아리다.”

— 고인이 세상을 뜰 때, 귀가 가장 늦게 닫힌다는 말이 있다.

“파드마 삼바바의 《티베트 사자의 서》엔 죽음을 둘러싼 모든 비밀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책에는 사람이 죽으면 혼이 빠져나가는데 몇 시간이 걸린다고 나와 있다. 우리는 고인이 운명하면 눈을 감겨드리고, 코에 티슈나 솜을 얹어 호흡을 확인한다. 고인 앞에서 입조심을 해야 할 사람은 장례지도사뿐만 아니다. 유족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이 운명했다고 곡(哭)을 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승에서의 마지막 말을 들려드려야 한다. 특히 종교를 믿는 분들이 고인에게 기원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수의에 눈물 떨구지 마라’

— 염할 때 금기(禁忌)는.

“수의에 눈물을 떨구지 말라는 말이 있다. 유족의 눈물이 수의에 묻으면 수의가 무거워 영혼이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슬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유족을 위해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금기를 만든 것 같다. 시신 위로 물건을 주고받는 행위를 해선 안 되며, 시신을 너무 움직여도 안 된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목욕과 수의를 입혀드려야 한다. 옷고름이 풀리지 않게 매듭지어도 안 된다. 상주도 아니면서 울상을 짓고 있어도 안 된다. 표정이 너무 밝아도 어두워도 안 된다. 그만큼 염장이의 일에는 중용(中庸)이 필요하다. 염할 때의 금기는 대부분 고인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 고인이 여자일 경우, 어떻게 하나.

“아무리 죽은 사람이라지만 여자인 고인을 남자가 씻긴다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5촌 아주머니, 둘째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고모가 목욕시켜드리고 옷 입혀드리는 것을 보고 자랐기에, 고인이 여자인 경우 내가 직접 염습을 주관하지 않고, 여자분의 손을 빌린다. 1999년 전문대학에 장례학과가 생기고 나서 2년 후에야 여자 장례지도사들이 배출되었으니, 그전엔 여자 염사들을 정말 찾아보기 힘들었다.”

— 고인을 입관할 때 유족들이 고인을 만나게 되는데, 고인의 모습이 가부키 배우 같은 짙은 화장을 하고 있어 어색한 느낌이 들더라.

“장례지도사는 염습 과정에서 고인의 얼굴에 화장을 한다.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입술에 연지를 칠하고, 얼굴에 화사한 베이스를 바른다. 마치 다른 사람 같은 느낌도 든다. 나도 이것이 정말 고인을 위한 것일까 의문이 든다. 그래서 나는 과도한 화장은 하지 않는 편이다. 가급적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평소 모습으로 유가족들을 만나게 하려고 노력한다.”

— 염습을 하면서 아쉬웠던 순간은.

“분홍 치마저고리를 입고 볕이 드는 소파에 누웠다가 조용히 세상을 뜬 할머니를 염한 적이 있다. 80세가 넘은 이 할머니는 나이 마흔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다. 2남 1녀의 자녀를 남겨놓고. 남편이 죽기 전에 선물한 분홍 치마저고리는 할머니가 가장 아끼는 옷이었다. 자녀들 결혼식부터 환갑, 칠순잔치에 꼭 꺼내 입는 가장 중요한 날에만 입는 옷이었다. 할머니는 지병이 악화되고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자 자신의 죽을 날을 직감한 듯 곡기를 끊으셨다. 아들 내외의 간곡한 간청에도 할머니는 일주일간 누워만 있었다. 할머니는 출근하는 아들에게 소파에 앉아 느린 손짓으로 잘 다녀오라 하고, 며느리가 설거지하는 동안 소파에 앉아 세상을 떠났다. 장례 의뢰를 받고 보니, 따로 염습할 게 없었다. 스스로 목욕하고 분홍 치마저고리를 입으셨으니 스스로 염습을 마친 것이다. 유족에게 그 옷의 의미를 듣지 못해 분홍 치마저고리를 삼베 수의로 갈아입혀 관에 모셨다. 나중에 사연을 듣고 할머니의 분홍 치마저고리를 갈아입혀 드린 것이 큰 실수란 걸 깨달았다. 할머니는 마지막 호흡까지 느끼고 돌아간, 오복의 하나인 고종명(考終命·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음)을 하셨던 것이다.”

— 혹시 대표님과 악수를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나.

“지금도 손을 내밀면 쭈뼛거리는 사람도 있다. 이건 사실이다. 결혼식장엘 가면 꺼리는 사람들도 있어서, 결혼식장엔 잘 안 간다. 염할 때는 고맙다고 하다가 조문객이 많을 때 음식 나르는 일을 거들면 대놓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종종 만난다. 시신을 만진 손으로 음식을 만지면 어떡하냐고 말이다. 고인을 오염물이라도 되는 양 여기는 건 고약한 편견이다. 산 사람이 매일 만지는 휴대전화가 고인보다 더 오염되었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엔딩노트를 쓰자

— 장례에 대한 철학은.

“장례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한 가지는 고인에 대한 시신 처리 기능, 또 한 가지는 고인의 사회적 관계 정리다. 시신의 처리만 한다면 천박하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이 주인공이 되는 맞춤 장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만화가가 죽었을 때 그의 관이 만화 캐릭터로 온통 낙서가 된 것을 보았다.”

유 대표는 ‘산 사람 중심’의 장례 문화를 ‘고인 중심’으로 바로 세우는 게 장례지도사로서의 마지막 바람이라고 한다. 유 대표는 장례 문화를 더 공부하기 위해 2002년 미국에 갔다. 미국은 장례식에서 관을 열고 조문객이 고인에게 다가가서 만지거나 입맞춤하는 관습이 있기 때문에 염습 과정에서 시신의 피를 모두 빼내는 엠바밍을 한다. 장례식 동안 시신을 위생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다.

유 대표는 “장기적으로 보면 병원은 사람을 고치는 치료의 공간이고, 장례식장은 고인을 추모하는 공간”이라면서 “미국은 장례식을 교회나 집을 개조한 장례식장에서 치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문객을 받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고, 그 시간에 조문객과 함께 고인을 추모하는 추도사를 읽거나 고인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기도 한다”면서 “전날 고인과의 대면의식, 발인 날 영결식, 장지에서의 안장식이 있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전문 장례식장으로 발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 우리 장례 문화에서 시급하게 고쳐야 할 것이 있나.

“가족끼리 고인의 죽음을 공유(共有)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죽음을 살필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장례식장·상조회사의 경우, 고인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번호로 고인의 부고를 보내기도 한다. 고인은 생전에 ‘엔딩 노트’에 자신의 장례식에 왔으면 하는 조문객 목록을 미리 작성해두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삼일장을 치르다 보면, 조문객이 아무 때나 장례식장을 방문한다. 봉투 하나 내고, 이름 쓰고, 고인과 유족에게 예를 표하고, 지인들과 얘기하면서 준비된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면 끝이다.”

— ‘웰다잉’도 중요한 것 같다.

“요즘 어떻게 하면 잘 죽느냐를 물어보는 분들이 많다.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을 보면 ‘죽음’은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운명’이라고 했다. 17세 때부터 줄곧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여기며 살았다고 한다. 오늘이 일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인생의 순간순간 선택에 있어서 확실해진다. 삶은 맞이하는 죽음과 당하는 죽음이 있다. 패션디자이너인 딸에게 ‘나 죽거든 빈소에 가수 이장희의 ‘그건 너’ ‘한 잔의 추억’을 은은하게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 언제까지 ‘염장이’ 일을 할 생각인가.

“장의사는 정년이 없다. 어느 스님이 내 사주(四柱)에 돼지 세 마리가 있어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서, 큰돈은 못 벌지만 ‘영가들의 등대’가 될 것이란 말씀을 하셨다. 나는 염하는 것뿐만 아니라 장례 문화를 위해 일평생 일하고 싶다. 전국에 장례지도사 자격증 가진 사람이 1만5000명 정도 되는데, 그분들에게 우리 장례 문화에 대해 제대로 알리고 싶다. 대학 6곳에 장례 관련 학과가 설치됐는데, 그곳에 출강하면서 후학들을 양성하고 싶다.”

유재철 대표는 기자가 ‘우울한 일터라서 표정관리가 힘들겠다’고 하자 “사람이 맨날 검은색과 흰색만 입으면 우울해진다고 하더라”면서 “기분 전환을 위해 그날 방위에 따라 오방색(五方色·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색)을 입는데, 오늘은 남쪽을 상징하는 빨간 팬티를 입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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