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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홀린 ‘강남 오빠’ 싸이의 우성 유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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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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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679 2012/11/15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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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블로그에서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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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홀린 ‘강남 오빠’ 싸이의 우성 유전자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한국가요사를 새로 쓰고 있다. 9월15일 마침내 미국 아이튠즈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아이튠즈는 미국 유료음악시장 점유율의 80%를 차지, 그 순위는 미래 수요 예측의 시금석으로 간주된다. 같은 날 유튜브에 오른 싸이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는 1억 6000만 조회 수를 기록해, 2억 조회를 향한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간다. 오히려 더 큰 관심은 ‘강남스타일’ 열풍이 어디까지, 언제까지 이어질까 하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대중의 관심은 싸이의 오랜 내공과 깊은 저력에도 쏠린다. 그의 B급 정서와 음악이 갖는 놀라운 대중성과 파급력의 정체와 배경에 호기심과 찬탄이 쏟아지고 있다.

 

때맞춰 싸이의 본격적인 미국 프로모션도 시작됐다. 저스틴 비버, 칼리 레이 젭슨 등 최고 가수들이 속한 ‘스쿠터브라운프로젝트’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었고, ‘유니버설리퍼블릭 레코드’와는 한국·일본을 제외한 전 세계의 음반유통 계약을 체결했다. 싸이의 부상은 그의 정체성을 규정했던 상투적인 시각에도 변화를 불렀다. 200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통속성을 이끌고 있는 키워드 중 ‘엽기’는 섹슈얼리티와 더불어 가장 폭발적인 이슈 중 하나였다. 이것은 검열로부터 자유로운 인터넷 문화의 확산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러나 싸이의 본령은 결코 ‘엽기’에 있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단 한번도 ‘엽기’를 주장하지 않았음에도, 언론과 세상은 그를 너무도 쉽게‘엽기 컨셉트’로 몰아간 경향이 있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은 “랩의 주절거리는 산문성이 집중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그의 탄탄한 데뷔 앨범을 곰곰이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랩에 대한 그의 ‘진지하고도 순정적인 신뢰와 헌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상 ‘순정적 신뢰와 헌신’이라는 싸이의 키워드는 그의 인생에 내재한 것이다. 그가 ‘강남 보이’의 부정적 이미지와 인생행로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삶의 스타일을 개척한 것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또한 그는 부와 쾌락과 소비가 난무하는 강남의 부박한 특성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결국 그것을 자신의 예능적 기예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강남이라는 ‘플랑크톤 풍부한 해수’를 한껏 흡입해 ‘강남을 넘어서는’ 새로운 장르 개척의 험로를 용감하게 밟아나간 것이다. 그는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강남의 아들’이다.

 

‘강남 보이’ 싸이는 이제 ‘세계인의 아이돌’로 진화했다. 그의 곡절 많은 인생이 선명한 궤도를 타고 도약을 시작하면서 좌충우돌 적, 카오스적 삶이 가지는 나름의 가치까지도 조명을 받는다. 이것이 ‘강남스타일’의 히어로 싸이의 삶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다.

 

 

강력한 스토리와 스타일의 아우라

 

싸이(본명 박재상·35)의 가장 두드러진 정신적 특질은 ‘독립성’에 있다. 이 독립성이야말로 오늘의 싸이를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이다. ‘자수성가’를 성취한 가족력, 그 피에 흐르는 강력한 DNA는 그가 내뿜는 에너지와 활력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누구든 싸이를 보는 순간 그가 뭔가 ‘강력한 스토리와 스타일’을 장착하고 있다는 전율을 느끼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의 선배이자 한때 음악활동을 같이 했던 가수 겸 탤런트 이진성이 싸이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전율이다. 싸이의 독특한 스타일은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드러났던 정신적 특질이라는 얘기다.

 

싸이를 논할 때 늘 인용하는 유명한 삽화가 있다. 싸이는 1996년 강남구 반포의 세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대 국제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가자마자 휴학을 하고 환불 받은 학비로 ‘음주’와 ‘가무’를 즐기고, 많은 이성을 만나고 돌아다녔다고 고백한 바 있다. 부모에게 일언반구 상의도 없었으니 그의 ‘방자함’은 분명 도를 넘는 것이었다. 결과론일 수도 있지만 그 시절 그 같은 ‘방황’이 엔터테이너로서의 오늘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방탕’하기로 결심했지만 그 같은 ‘방탕’ 속에서 자신의 특질을 발견했다. 누군가를 웃기거나, 누군가를 행복하게 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이 그를 음악의 세계로, 더 구체적으로는 당시 유행했던 힙합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는 처음 입학한 보스턴대에 이웃한 버클리 음악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자수성가’를 성취한 가족력, 그 피에 흐르는 강력한 DNA는 그의 조부 고 박기억 씨로부터 비롯된다. 싸이의 아버지는 반도체 장비를 생산하는 ㈜디아이의 박원호 회장이고 박 회장은 디아이의 창업주 박기억 회장의 장남이다. 조부 박 회장은 월남한 실향민 출신으로 1955년 충무로에 광학제품을 수입해 되파는 무역업체 동일상사를 창업했다.

 

박기억 회장의 차남은 박원덕 부회장이다. 디아이의 지분을 보면 박원덕 부회장의 지분이 박원호 회장 지분보다 조금 많다. 싸이는 아직 디아이의 지분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지난 2001년 11월 지병으로 조부가 세상을 떠날 때 싸이는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돼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싸이는 그 불효에 대해 지금도 가슴 아파하며 가끔 술자리에서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조부인 박기억 회장은 자상하면서도 호방한 성격에, 사업 능력이 탁월했다. 맨손으로 월남해 탄탄한 사업을 꾸릴 만큼 독립심이 강했고, 가족 사랑도 끔찍했다. 조부의 직선적이면서 호탕한 성격은 부친 박원호 회장을 거쳐 싸이의 피 속으로 흘러들었을 것이다.

 

조부는 싸이의 정서적 스승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서예를 같이 배우기도 했고,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술도 할아버지에게서 배웠다. 부친이 싸이의 가수 데뷔를 극력 반대할 때도 할아버지는 아들을 타일러 손자가 걷고 싶은 길을 열어주었다. 조부의 존재가 없었다면 싸이의‘강남스타일’은 결코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싸이의 외형적 스펙은 전형적인 ‘강남 스타일’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강남의 중심을 떠나본 적이 없다. 중견 회사의 오너인 부친과 미국 유학 경력, 병역 특례 입학, ‘망나니’로 불리던 젊은 시절의 좌충우돌에 이르기까지 그는 결코 좋은 의미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강남의 적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싸이는 결코 ‘강남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자수성가’의 가족력에는 엄한 훈육과 철저한 금전관,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계약적 관계’가 존재 했다.사이는 최근 한 TV 토크쇼에 나와 그 관계의 핵심을 ‘성과제’로 표현한 바 있다. “2007년 군에 재입대할 때 엄청난 액수의 CF 위약금을 물어야 했다. 변호사 비용으로 가진 돈을 다 써서 아버님께 부탁했더니 차용증을 쓰라 하셨다. 제대 후 몇 달 동안 열심히 일해 돈을 돌려드렸더니 ‘기특하다’고만 하시고 그 돈을 그대로 받으시더라….”

 

 

싸이가 죽기살기로 삶을 개척한 이유

 

싸이의 어머니 김영희(62) 씨는 강남 중심에 고급 음식점 3곳을 운영하는 사업가다. 싸이는 그곳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도 꼬박꼬박 음식 값을 지불한다. 마찬가지로 싸이의 공연장을 찾을 때 싸이의 부모는 직접 표를 구입해 콘서트를 본다고 한다. 싸이는 “어렸을 때는 너무 싫었는데 그런 방식이 아니면 내가 죽기 살기로 이렇게 열심히 일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부모님의 그런 교육 방식을 납득할 수 있게 됐다.”

 

결코 가볍지 않은 체벌도 종종 당했던 모양이다. 싸이는 “아버님의 발차기는 일품이었다”는 말로 어린 시절 부자 간 갈등과, 이어졌던 체벌의 실상을 고백한 적이 있다. 싸이의 부친은 원리원칙주의자였고 모범납세자 상도 여러 번 받을 만큼 주변의 깔끔한 정리에 신경을 썼다. 그러나 싸이는 아버지의 세계가 제시하는 규칙과 엄한 훈육의 답답한 테두리를 참아내지 못했다. 그는 선생님에게, 또는 아버지에게 대들고 항의하고 종종 일탈했다. 싸이는 이렇게 고백한다. “담배를 끊으라고 하셨을 때, 나는 ‘아버님부터 끊으시라’고 했다. 음악을 하겠다는 의지를 막으려 하실 때 나는 ‘아버지는 작곡을 해보셨느냐’고 대들었다. 도대체 아버님은 왜 당신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저토록 확신을 갖고 말씀 하시는가… 이런 불만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2001년 대마초 사건으로 경찰서에 불려갔을 때, 싸이의 부친은 담담하고 초연했다. 싸이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투박한 이북 사투리로 “이 참에 담배 끊으라우!” 한마디를 남기고 경찰서를 떠났다고 한다. 싸이는 악수하는 부친의 손에서 ‘울음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이제 너무나 커버린 자신을 부친이 커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싸이는 최근 “그날 마침내 나는 아버지를 극복하고 어른이 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싸이는 좋은 머리를 갖고 있었지만 공부에 힘을 쏟지 않았다. 부친은 경기고(64회), 연세대를 졸업했고 모친도 경기여고(57회)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 진학한 모범생이었다. 누나 박재은(38) 씨는 학창시절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던 수재였다.

 

재은씨는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언어학을 전공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요리학교이자 다국적 요리전문 법인인 프랑스의 ‘코르동 블루’에서 공부했다. 그는 현재 푸드스타일리스트, 파티플래너, 요리사로 활동하는 커리어우먼이다. 배포와 너스레, 거침없는 언변이 싸이를 닮았다고 한다. 그는 요즘도 “‘사’자가 들어간 직업이 좋은 직업”이라며 “(푸드스타일리스트 말고) 꼭 요리사로 불러 달라”는 주문을 한다. 지인들은 이 두 사람을 ‘구라남매’로 부른다. 두 사람이 노는 품새가 항상 거침없고 달변에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싸이는 누나 재은씨를 이렇게 평가한다.

 

“나는 어머니를 닮아 말이, 누나는 아버지를 닮아 글 솜씨가 발달했다. 각종 브랜드 론칭 파티를 능숙하게 수행하는 파티플래너로, 예컨대 일본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전과 관련된 파티 등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200~300명분의 요리를 뚝딱 해치우는 탁월한 요리사이기도 하다.” 싸이는 목표를 정하면 무섭게 돌진하는 스타일이다. 그가 끼나 재능·재력만으로 이룰 수 없는 성공을 거둔 이유다. ‘강남스타일’의 놀라운 성취는 비록 홀연히 찾아온 것이지만, 그 성공을 잉태한 단단한 텃밭은 그 스스로 일군 것이다. 이 점이 싸이를 다른 사람보다 돋보이게 하는 요소다. 그는 ‘강남의 적자’이면서 동시에 ‘강남의 이단아’이기도 했다.

 

치열한 목표의식이 있었고, 강남의 부모가 제공하는 달콤한 꿀물을 결코 받아 마시지 않으려 했다. 예컨대 영어공부만 해도 그렇다. 싸이는 외국유학 계획을 부친에게 설득할 때도 ‘치열한 노력’을 담보로 제시했다. 그는 우선 “글로벌 시대 아버지 뒤를 잇는 사업가가 되기 위해선 큰물에서 배워야 한다”고 운을 뗐다. 부친은 유학을 가기 위한 조건으로 적절한 수준의 영어실력을 요구했다. 싸이는 불과 한달만에 토플 성적 580점을 받아 아버지를 감동케 했고 자신의 ‘집중력’을 입증했다.

 

싸이의 유창한 영어는 ‘술과 장미의 나날’이었던 미국 유학 시절, 다양한 분야와 여러 인종의 미국인들을 만나 교유한 결과물이다. 탁월한 ‘스피커’로서의 재능은 영어라는 무기를 탑재해 더욱 강력해졌다. 미국인들은 최근 그가 출연한 각종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싸이의 유창한 영어에 담긴 한국식 유머에 신선함을 느꼈을 것이다.싸이는 독립적 인간이지만 동시에 공동체 지향적이고, 보수적이며, 낯을 가리고 심지어 가부장적이기까지 하다. 누나 재은씨는 비슷한 맥락에서 싸이의 성격적 특질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선 따뜻하다. 음식점에 가서 맛있으면 꼭 싸가지고 와서 가족들을 먹인다. 곰살맞고 예쁜 짓을 많이 한다. 싸이는 공동체 속에서 힘을 얻고, 그래서 공동체가 잘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을 따뜻하게 챙기는 스타일이다.”술을 마실 때도 이 같은 보수적 기질, 보스의 기질이 강하게 드러난다. 우선 싸이의 술 실력. 그의 주량은 연예계 내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청탁불문, 두주불사다. 운동선수들과 마셔도 절대 꿀리지 않는다. 싸이가 술 마시다 토하거나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술자리에 여자가 있건 없건, 자세의 흐트러짐이 없는 것도 그의 술자리 매너의 강점이다.

 

 

특유의 보수성이 단단한 재능 키웠다

 

싸이는 자신의 동료들을 잘 챙기기로 유명하다. 스탭들과 술자리를 할 때는 절대 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는다. 연습이 끝나고 매니저·댄서·안무가 등 평소 패밀리로 생각하는 사람과는 보통 아침까지 마시는 경우가 많다. 누구든 술 마시다 먼저 자리를 뜨는 일은 물론 용납되지 않는다. 싸이의 보수적·가부장적 기질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그는 스탭들과 갖는 술자리를 유난히 좋아한다. 그때는 주로 소주를 마신다.

 

연습할 때 스탭을 독려하는 방법도 특별하다. “빨리 제대로 마치고 뒤풀이 하자”는 말로 연습의 강도를 높여나간다. 그의 보수적 기질은 스탭들을 좀처럼 바꾸지 않는 데서도 드러난다. 실력이 좋은 신입보다 10년 이상 호흡을 맞춘 ‘늙은 동료’들을 더 신뢰한다. 실제로 그의 안무와 댄스팀 ‘매니아’의 7인 멤버들은 가수 데뷔 이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이 같은 보수성과 폭발적인 창의력이 과연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궁금해 한다. 싸이의 천재적 능력은 ‘탤런트’의 측면보다 오랜 시간의 ‘내공과 단련’ 속에서 서서히 성장한 비중이 더 큰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절친한 가수 성시경의 지적처럼 “특유의 보수성이 그의 재능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기질적으로 ‘마초’다. 첼로를 전공한 음악도 유혜연 씨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전 한 여자를 100일 이상 만나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심지어 자신의 꿈이 나이 마흔에 스물네 살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었다고도 말했다. 아침식사로 9첩 반상을 받는다거나, 가수 성시경이 유혜연 씨에게 지어줬다는 ‘아내계의 법정스님’ 같은 별명도 자랑스럽게 공개한다. 그는 “가장과 싸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전제한 후,“싸이는 아빠 같아도, 남편 같아도 안 된다”는 말로 위험수위에 근접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걸작이고, 자못 심오한 직업의식을 드러내 주목을 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필(feel)이 떨어진다. 필이 떨어지면 결론적으로 우리 가족은 굶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가족의 안녕과 윤택함을 위해서 필을 유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정량의 ‘밤공기’를 마셔야 한다.” 요컨대 제대로 된 아빠가 되기 위해 아빠를 포기해야 한다는 싸이 특유의 역설이다. 여기서 ‘밤공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도시의 인간들이 밤에 모여 술 마시고 춤추고 담소할 때 느껴지는 ‘달뜬’ 분위기다. 싸이는 이 ‘해방의 공간’에서 자신의 음악적 문법과 커뮤니케이션의 기술과 엔터테인의 창조적 순간을 포착한다.

 

‘좋은 가장이 되기 위해 가장이기를 포기한다’는 싸이의 역설은 물론 아이러니다. 그러나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 같은 역설을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믿는다. 음악을 창조하는 한 명의 예능인으로서,‘필’을 유지하게 하는 ‘밤의 기운’이 싸이에겐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하는 것이다. “철이 드는 것이 무섭다”, “나는 철이 들어서는 안된다”는 그의 고백도 대중의 욕구에 조응하는 ‘필’을 유지해야 한다는 그의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싸이는 일에 관한 한 그렇게 무섭고 지독한 면모를 보여준다.

 

싸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팀이 연습장에서, 또는 무대 위에서 열정을 보이지 않을 때다. 이루 말할 수없는 실망감을 표출하며, 만족할 때까지 이어지는 그의 가혹하고도 집요한 요구가 시작된다. 이렇게 실망스런 날에는 술자리에서의 긴 토론이 이뤄진다. 엄중한 질책이 내려지는 현장인 동시에 서로 위로하고 각오를 다지는 세리모니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의 음악과 춤은 완성된다. 그는 관찰력이 좋고 메모리 능력이 탁월하다. 대화를 나눌 때도 남들이 말하는 은어, 재미있는 표현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기억하는 습성이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언어와 표현을 자신의 노래가사에 채용한다. 싸이 음악에 빈 곳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또한 그의 노랫말이 가벼우면서도 일상과 거리와 술집의 신선한 표현으로, 때로는 심오하게 느껴지는 표현으로 가득 찰 수 있는 비결이다.

 

 

눈썰미로 창조한다.

 

춤도 마찬가지다. 그는 남이 추는 춤을 유심히 보고 그 춤을 즉각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출중하다. 취재에 응한 싸이의 지인과 동료 상당수가 그의 이 같은 응용력과 유연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메모리는 단순한 암기력이라기보다 관찰력이 가미된 일종의 ‘눈썰미’로 볼 수 있다. 눈썰미를 가동해 얻는 어설픈 모방이 때로는 전혀 새롭고 낯선 효과를 획득한다. 이것이 대중예술 창조 과정의 비밀이요, 변증법이다. 싸이는 이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섬세한 관찰자다.

 

그럼에도 그는 고집불통이다. 누가 와서 뭐라 해도 밥 먹을 땐 밥을 먹어야 한다. 식당에서 팬들이 알아보고 사인을 부탁해도 밥을 먹어야겠다고 결심하면 미동도 하지 않는 고집이 있다. 밥을 일단 다 먹고 사인을 시작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꼭 하고, 자신이 원하는 일은 관철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그의 고집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역시 무대다. 2009년 12월에는 공연 중 사고를 당했다. 크레인을 타고 관객석을 훑다가 전원이 갑자기 꺼져 크레인이 떨어졌다. 그 일을 겪고 리콜공연을 할 때 다시 크레인을 탔다가 똑같은 사고를 당했다. 무모한 시도를 다시 했던 이유를 그는 “관객에게 보여줄 너무 굉장한 장면을 못 보여드려 분했다”고 설명했다. 3층 높이에서 떨어진 이 두 번의 사고를 당한 후 그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공포감을 느꼈다. 또한 부인에게는 “한 번만 더 ‘와이어’를 타면 이혼 하겠다”는 협박을 받아야 했다.

 

그는 침을 소지하고 무대에 선다. 공연 후반기에 자주 발생하는 근육 경련 때 스스로 다리를 찔러 피를 내기 위해서다. 대기실에서 찌를 때가 많지만 무대 위 관객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침으로 피를 낼 때가 있다. 공연 때 스탭들은 산소 호흡기를 준비한다. 공연 2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탈수와 호흡곤란 증세를 완화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놀라운 열정의 이면에는 ‘대마초 사건’, ‘군 재 입대 사건’ 등으로 야기된 긴 공백과 자숙기가 크게 작용했다. 그의 유일한 돌파구는 대중과 직접 만나는 콘서트였고, 콘서트의 성패는 가수 싸이 인생의 성패와 직결된다는 자각이 그를 분발케 했을 것이다. 그는 콘서트의 동료들에게 “무대에서 죽자”는 직설적인 말로 무한 열정을 요구한다. 지독한 프로정신이다.

 

싸이에게는 ‘버클리 음대’ 출신이라는 레이블이 붙어 있지만 그가 이 대학에서 화성학 등 제대로 된 음악이론 공부에 매진했던 것 같지는 않다. ‘버클리 음대’는 서부의 명문 ‘UC 버클리대’와는 관계가 없다. ‘UC 버클리대’에는 클래식을 전공하는 음대는 있지만 대중음악을 가르치는 전공학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어느 대학에서 유학했는가는 사실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는 당시 미국이라는 거대한 ‘음악대학’에 풍미했던 ‘랩 음악’의 세계에 자신의 몸을 푹 빠뜨렸다. 노래를 하지 않고 ‘말 만 으로’ 가수가 될 수 있고, 심지어 그래미상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흥분했다.

 

그가 강의실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모범생이었다면 지금의 싸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유학시절 랩에 열중한 탓에 그는 아주 정확한 한국어 발음을 구사한다. 그의 노랫말이 청중의 귀에 화살처럼 꽂히는 이유다. 그는 경영학 공부를 포기하고 음악을 공부할 때부터 아버지로부터의 젖줄을 뗐다. 집으로부터의 모든 지원이 차단된 상태에서 그는 혼자 힘으로 미국생활을 꾸려나갔다. 처음에는 음대로 전학한 사실 자체를 숨기고 보스톤대 두 학기 분 등록금으로 악기를 사서 본격적인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 버클리 음대 재학 중에는 불법 CD를 만들어 판 것이 의외의 대박을 터뜨렸다. 내내 끊이지 않는 일종의 메들리 음반인데, 댄스곡 30분, 블루스 6분짜리를 두 타임으로 만들면 72분짜리 CD 음반이 만들어졌다. 그 음반이 한인 가게를 중심으로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자신의 곡도 만들기 시작했다. 2~3년간 50곡의 신곡을 만들어 그 데모CD를 한국 기획사에 돌렸지만 팔리지 않았다. 그때 그가 작곡한 곡 중에는 나중에 그가 직접 불러 히트시킨 ‘새’가 포함돼 있다. 아버지로부터의 지원이 모두 끊긴 순간 그는 스스로 가수가 되겠다는 선택을 했다. 정식으로 제도권에 진입한 것은 1999년 9월에 발표한 조PD의 2집에 참여하면서부터다. 2001년 싸이라는 이름으로 첫 앨범이 나왔다. 조PD의 노래보다 덜 공격적인 노랫말과 더 대중적인 멜로디로 자신을 차별화했다. 이 앨범의 ‘새’와 ‘끝’은 공중파 3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기록하며 싸이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싸이는 그해 11월18일 2집 발매를 불과 1주일 앞두고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됐다. 역시 사람은 잘나갈 때 조심해야 하는데, 인생 부침의 오묘한 진리를 파악하기에 스물다섯 나이의 싸이는 너무도 젊었다. 그 탓에 2집 앨범은 2002년 1월 발매됐다. 방송 활동을 할 수 없었기에 이 앨범에서는 대중적인 히트곡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노래 제목은 ‘처녀 논쟁’ 신‘ 고식’ ‘나쁜 년’처럼 ‘동네 건달’들의 허튼 농담 기조를 유지했다.

 

 

대중은 진실의 가벼움, 가벼움의 진실에 열광한다.

 

대마초 흡연 혐의로 대중 앞에서 강제로 퇴장당한 것은 싸이에게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남을 즐겁게 만드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깨달았던 그가 팬과 무대를 동시에 잃은 것이다. 시인 기형도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시를 남겼지만 싸이에게는 사랑을 고백할 팬도, 노래할 무대도 남아있지 않았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2002년 6월 월드컵이 구원의 천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광대’ 싸이는 시민과 함께 시청 앞으로 나갔고, 응원전에 몰입한 싸이에게 시민들은 너그러웠다. 방송사 중계 카메라도 그를 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송 금지가 풀리고 싸이는 2002년 9월 3집 <3마이>를 들고 나타났다. 그를 구원한 트랙은 ‘챔피언’이었다. 부정적인 노랫말 대신 ‘당신이 챔피언’이라는 긍정적인 가사가 대중에게 어필했다.

 

‘노래하고 즐기고 외치는 당신이 챔피언’이란 가사는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달콤한 위안이었다. 이후 싸이는 2003년부터 2005년 11월까지 병역 이행을 위해 병역특례 업체에서 35개월간 복무를 마쳤다. 하지만 병무청으로부터 부실하게 근무했다는 이유로 편입취소 통보를 받고 2007년 12월17일 나이 서른에 현역으로 재 입대를 했다. 대한민국 성인 남자에게 가장 전형적인 악몽이라 할 수 있는‘군대 두 번 입대’를 그는 몸소 실현했다.

 

 

군 재 입대는 당연히 전화위복이 됐다. 군 입대를 앞두고 미국으로 가버린 유승준과는 정반대의 행보였으니 싸이는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됐다. 부잣집 아들과 병역 기피자라는 굴레를 동시에 벗게 된 효과가 무엇보다 컸다. 2009년 7월 ‘완전 제대’한 싸이는 2010년 8월 자신의 회사 문을 닫고 YG엔터테인먼트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5집 앨범을 냈고 여기서 ‘Right Now’가 히트하면서 그는 지속가능한 가수로서의 파워와 가능성을 확보했다. 이후 싸이는 최고의 ‘티켓파워’를 갖는 콘서트 가수로 떠올랐다.

 

지난 7월 발표한 <6갑>에 수록된 ‘강남스타일’이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것은 그가 10여 년간 노래와 인생 자체로 보여준 ‘난리 블루스 생쇼’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그 동력이 언제까지,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지 싸이의 ‘세계적 생쇼’에 거는 대중의 기대감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그가 보여준 세계는 판타지이면서 조롱이지만 거기엔 근엄한 세상이 보여주지 못하는 진실이 있다. 그 진실의 가벼움, 가벼움의 진실에 대중은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인의 말춤 전염… 믿기지 않는 사태다”

 

‘말춤’이 세계적인 커버 콘텐트로 부상했다. 9월 14일 ‘말춤’의 뉴욕 점령의 장관은 특히 강렬했다. 싸이가 록펠러 광장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된 미국 NBC <투데이 쇼>에 출연해 히트곡 ‘강남스타일’을 라이브로 열창한 것이다. 역시 폭풍 댄스였다. 녹색 턱시도에 선글라스를 쓰고 등장한 싸이는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열정으로 뉴욕시민들을 열광시켰다. 다소 엽기적이고 우스꽝스런 이 춤이 세계를 진동시키리란 예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이 춤을 직접 만든 이주선(38) 싸이 매니아 안무단장도 물론 그랬다. 중학교 때부터 콜라텍을 전전하며 배웠던 온갖 춤이 이처럼 거대한 물결의 단초가 됐다는 것이 신기하다. 9월 7일 이 단장을 만나 ‘말춤의 탄생 비화’를 들었다.

 

“25년 전 영등포 나이트클럽과 콜라텍에서 말춤이 잠깐 유행했던 것을 기억했다. 손동작만 조금 고쳐 당시 미국에 있던 싸이에게 동영상을 보냈다. 바로 전화가 왔다. 엄청나게 큰 웃음소리에 이어 ‘베리 굿’이란 싸이의 유쾌한 외침이 들렸다."

 

2년 만에 컴백한 싸이의 춤 안무는 강한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싸이는 늘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 단장은 ‘강남스타일’ 음악을 받고 나서 그 곡을 200번 이상 들었다고 한다. 줄담배를 피우면서 말이다.

 

“번개처럼 25년 전 그 춤이 생각났다. 여자가 앞에 있으면 남자가 뒤에서 골반을 튕기는 식의 부비부비 스타일의 춤이다. 클럽에서 일렉트로닉 음악에 맞춰 껑충껑충 뛰는 모습을 결합했다. 적어도 국내 클럽에서는 유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믿을 수 없는 사태다.”메인 파트에서 ‘춤이 터져줘야’ 안무가는 산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 단장은 고민했다. 그런데 섬광처럼 떠오른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 고민을 한방에 날렸다. 원래 안무대로, 거의 손을 보지 않고 확정했다. YG 양현석 대표도 흡족해했다.

 

“싸이는 매우 독특한 춤꾼이다. 잘 춘다고도, 못 춘다고도 할 수 없는 실력이다. 그런데 맛깔나게 춘다. 이상한 끼가 있는데 잘 설명할 수 없다. 둥글둥글한 체형은 분명 댄서의 몸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춤을 춰도 그것을 자기 스타일로 소화한다. 관찰력이 예민하고 센스가 있고, 자신의 특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싸이는 여자 춤을 잘 춘다. ‘골반 흔들기’가 강점이다. 공연할 때마다 그가 비욘세 등 여가수들의 춤을 패러디하는 이유다. 이미 싸이 공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눈요깃거리로 정착했다. “싸이는 춤이 잘 안 풀릴 때 정말 심각하게 고민한다. 자신이 ‘비쥬얼’이 안 된다고 생각하니 더 그런 모양이다. 그런데 무대 위에서의 퍼포먼스는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다음 프로젝트가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과연 이보다 더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KSA 지식레트

 

 

 

하나의 사람이 완성되기까지...

숱한 역경과 고난이 기다립니다.

 

싸이는

그러한 삶의 드라마를 갖고 있고...

드라마틱한 삶이 있었기에 지금의 싸이가 있습니다.

 

투자를 했다는 것은...

그 회사의 어떤 가능성을 본 것이고..

그러한 가능성을 봤기에 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투자와 투기를 혼동해서..

주주들을 매도하는 단타쟁이들은

조까는 소리 그만 하고...

아닥하고 꺼지라고 전해주고 싶네요...

 

즐밤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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